4. 정신병리 이론
1) 정신병리의 일반적 원인
건강한 유기체는 환경과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접촉 주기를 반복하면서 성장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접촉 주기가 항상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한 알아차림-접촉 주기의 여섯 단계 중 어느 단계에서나 단절될 수 있습니다. 어떤 단계에서든 차단이 되면, 유기체는 게슈탈트의 자연스러운 형성과 해소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접촉경계 장애'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접촉경계란 개체와 환경 간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개체의 모든 활동은 항상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며, 게슈탈트의 형성과 해소도 환경과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개체와 환경의 교류는 접촉경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접촉경계는 어떤 고정된 공간적 경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와 환경이 한 덩어리가 아닌 상태에서 서로 교류함을 의미할 뿐입니다.
접촉경계 혼란은 개체와 환경 간의 경계에 문제가 생겨 개체와 환경의 유기적인 접촉을 방해하는 것으로, 개체는 이로 인해 미해결 과제를 쌓게 되고 마침내 환경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는 데 실패합니다. 건강한 개체는 접촉경계에서 환경과 교류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를 열어 받아들이고, 환경에서 들어오는 해로운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닫음으로써 이들의 해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경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이러한 환경과의 유기적인 교류접촉이 차단되고 심리적·신체적 혼란이 생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모든 정신병리 현상은 항상 '접촉경계 혼란'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봅니다.
펄스는 접촉경계 혼란을 개체와 환경이 서로 직접 만나지 못하도록 둘 사이에 마치 중간층 같은 것이 끼어 있는 현상이 말했습니다. 마치 우리의 의식에 안개가 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중간층을 그는 '마야'라고 불렀는데, 이는 개인과 환경의 접촉을 방해하는 환상을 의미합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마야에게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에 환경과 접촉할 에너지가 남지 않습니다. 접촉경계 혼란으로 말미암아 개체는 자신의 유기체 에너지를 환경과 효과적으로 교류하고 접촉하는데 쓰지 못하고 공상이나 환상 같은 무의미한 활동들에 분산시켜 버립니다. 이러한 개체는 자신의 경계가 불명확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가 자기이고 어디서부터 타인인지 명료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접촉경계 장애가 심해지면, 접촉경계가 매우 불투명해지고 마침내 신체경계까지 모호해져서 심리적인 불안을 신체적 허기로 잘못 지각하여 음식을 먹는 행위로 대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펄스는 접촉경계 혼란을 극복하고 심리적 성숙에 이르기 위하여 5개 층의 신경증 상태를 통과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한 층을 통과할 때마다 환경과의 접촉이 현저하게 증진됩니다. 그 첫째는 피상층으로서 개인이 사회적인 규범에 따라 위선적인 상투적 행동을 나타내며 다른 사람들을 피상적으로 대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둘째는 공포층 또는 연기층으로서 진정한 자기 모습을 내보이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 부모나 주변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억압하고 환경에서 기대하는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셋째는 교착증으로서 이제껏 해왔던 역할연기를 그만두려 하지만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넷째는 내파층으로서 자신의 내면적 욕구와 감정을 알아차리고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지만 외부적 표현을 억제하는 상태입니다. 그동안 억압되었던 욕구와 감정은 그대로 발산되면 타인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기 때문에 표현되지 못한 채 긴장상태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지막은 폭발층으로서 다른 사람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접촉이 이루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펄스에 따르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진실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폭발을 경험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억압 없이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환경과의 접촉이 활발해집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타자와 접촉하며 실존적으로 진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2) 다양한 접촉경계 장애
게슈탈트 치료자들은 전통적인 진단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찬성하지 않습니다. 내담자들이 다양한 심리적 문제나 증상을 나타내는 것은 각기 다른 원인에 의한 접촉경계 장애 때문입니다. 펄스는 접촉경계 장애를 유발하는 주요한 심리적 원인으로 내사, 투사, 융합, 반전, 자의식을 제시했으며 Polster는 편향을 추가했습니다. 이러한 접촉경계의 장애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제각기 구분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1) 내사
내사는 개체가 환경의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은 환경과의 접촉을 통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입니다. 이때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선별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그러한 외부의 요구는 자신의 것으로 동화되지 못한 채 개인의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윗사람에게 순종하라."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등과 같이 부모나 문화로부터 요구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따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사가 심한 사람들은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잘 모른 채 타인의 기대에 따라 맞추어 사는데 익숙합니다. 이들은 윗사람의 요구를 잘 따르는 '모범생'으로 여겨질 수 있으나 스스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정하여 창의적인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또한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행동을 하며 깊은 대인관계를 맺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펄스에 따르면, 개인이 부모와의 과도한 동일시를 통해서 부정적 측면까지 내사하는 경우에 신경증이 발생합니다. 부모의 긍정적 측면은 자신의 것으로 쉽게 동화될 수 있지만, 부정적 측면은 동화되지 못한 채로 내사되어 개인의 통합성을 방해하여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신경증은 개인이 자기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사이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는 것, 즉 '경계장애'라고 할 수 있으며, 내사는 대표적인 경계장애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무엇이 자기이고 무엇이 자기가 아닌지를 명확히 구분하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투사
투사는 자신의 생각이나 욕구, 감정을 타인의 것으로 지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자신이 타인에 대해 애정이나 적대감을 갖고 있으면서 오히려 타인이 자신에게 그러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입니다. 투사를 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개체는 투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욕구가 좌절되는 것보다 고통을 덜 받게 됩니다. 또한 투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효과도 갖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공격성을 억압하고 타인에게 투사하는 내담자의 경우 투사를 함으로써 자신의 공격성을 방어하는 동시에 타인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됩니다. 투사는 내사의 영향에 의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즉, 개체에 내사된 가치관이나 도덕적 규범 때문에 자신의 특정한 욕구나 감정을 허용할 수 없는 경우에 이를 타인의 것으로 지각함으로써 해결하려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대인관계 갈등은 자신의 내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을 타인에게 투사함으로써 나타납니다. 우리 내면의 부정적 요소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기보단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타인을 사악한 존재로 규정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의 경우에도 투사가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내사된 가치관 때문에 무척 하고 싶은 충동적 행동을 억압하고 있는데, 이러한 행동을 하는 타인을 보게 되면 마치 자신의 충동이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3) 융합
융합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독자성을 무시하고 동일한 가치와 태도를 지닌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융합의 관계는 흔희 외로움이나 공허감을 피하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융합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감이 부족하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혼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혼자 있는 것은 커다란 공포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포기하고 타인과 합치는 것이 외로움과 공허감을 직면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융합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지극히 위해주고 보살펴주는 사이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의존관계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부부 사이나 부모-자녀 사이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오랫동안 사귄 친구 사이나 개인과 소속단체 사이에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어떤 갈등이나 불일치도 용납하지 못하며 서로의 관계를 깨뜨리는 행동은 암묵적인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상대편의 분노와 짜증을 사게 되고 그러한 행동을 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융합은 경계선 성격장애를 지닌 내담자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이런 내담자의 성장과정을 보면 부모-자녀 관계가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어 분명한 경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담자에게는 부모, 특히 어머니와의 경계를 분명하게 그어주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를 자각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는 한편, 부족한 자신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4) 반전
반전은 개인이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게 하고 싶은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혹은 타인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행동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즉, 반전은 타인이나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을 행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에게 화는 내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거나 타인으로부터 위로 받는 대신에 자위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반전은 개인이 성장한 환경이 억압적이거나 비우호적이어서 자연스러운 접촉행동을 할 수 없는 경우에 부모와 환경의 태도를 자신의 것으로 내사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개인은 반복되는 내사로 인하여 내면세계가 두 부분으로 분열되어 한쪽은 행위자로 다른 쪽은 피행위자로 됩니다. 그래서 원래는 개체와 환경 간의 갈등이었던 것이 이제는 개체의 내부 갈등으로 바뀌게 됩니다.
대부분의 반전은 분노감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분노는 개체의 가장 중요한 미해결 감정 가운데 하나로서 분노감정 차단은 다른 정서의 인식과 표현을 방해합니다. 분노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분노는 사라지지 않은 채 미해결 과제로 남아 다른 긍정적인 감정을 체험할 기회를 방해합니다.
반전은 신체적 통증, 강박증상, 열등의식, 죄책감, 우울증 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개체의 내부에서는 에너지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개체는 이를 통제하므로 팽팽한 긴장상태가 생겨 신체적인 긴장과 통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자신이나 타인에게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끊임없이 박복하는 강박증상은 해소되지 않은 유기체적 욕구와 이를 반전하는 자기 부분과의 싸움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비난하는 열등의식은 원래 타인에 대한 자신의 평가적인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 되돌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죄책감 역시 분노가 반전된 것입니다. 개인이 자신을 행위자와 피행위자로 양분하고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우울증 환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분노나 불만감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반전시킴으로써 죄책감에 빠지고 우울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전이 심해지면 자살을 시도하게 되는데, 자살은 개체가 타인에 대한 적개심을 송두리째 자신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5) 자의식
자의식은 개체가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의식하고 관찰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자의식은 반전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입니다. 즉, 개체가 자신의 주의를 외부 대상으로 향하는 대신 자기 자신에게 향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의식은 개체가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나 감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러한 행동을 했을 때의 결과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행동을 억제한 채 엉거주춤한 상태로 자신의 어색한 모습을 의식하게 될 때 생기는 심리상태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행동으로 표현되지 못한 욕구나 감정은 배경으로 사라지지도 전경으로 나타나지도 못하고 중간층에 머물게 되면서 접촉경계의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의식이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싶고 관심을 끌고 싶지만 거부당할까봐 두려워 행동을 드러내놓고 하지 못합니다. 이들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한다든가,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앞을 지나가야 하는 등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선을 받는 순간 자의식이 심해집니다. 대인공포증을 보이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6) 편향
편향은 개인이 환경과의 접촉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든 심리적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고 예상할 때 이러한 경험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서 환경과의 접촉을 피해버리거나 자신의 감각을 둔화시킴으로써 환경과의 접촉을 약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말을 장황하게 하거나 초점을 흩트리는 것, 말하면서 상대편을 쳐다보지 않거나 웃어버리는 것,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맴도는 것, 자신의 감각을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편향은 개인이 불안, 죄책, 갈등, 긴장 등 여러 가지 부정적인 심리상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적응기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불안의 방어가 중요한 목적입니다. 불안은 개인이 체험하는 다양한 종류의 고통과 부정적 감정에 총체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입니다. 펄스에 따르면, 불안은 행동으로 옮겨질 수 없는 흥분 또는 억제된 흥분 에너지입니다. 즉, 개인이 어떤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나 감정을 느낄 때 흥분 에너지가 동원되지만, 흥분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초래되는 좌절상황을 예상해서 흥분을 억제하게 되는데, 그때 느끼는 감정이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편향은 불안을 막는 방법으로서, 흥분 에너지 자체를 피해버리거나 둔화시키는 책략을 택한 것입니다. 펄스에 의하면, 개인이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여기'에 충실히 몰입하게 되면 흥분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옮겨질 수 있게 되고 불안은 체험되지 않습니다. 개인이 '지금-여기'를 떠나 미래의 부정적 결과를 예상하면, '지금-여기'의 흥분은 억제되고 행동으로 바뀌지 못한 흥분은 불안으로 더욱 커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