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신병리 이론
엘리스는 심리적 부적응과 정신장애의 근본적 원인은 비합리적 신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부적응 문제를 지닌 내담자들이 지니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의 내용을 밝히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엘리스는 정신장애나 문제 유형에 따라 비합리적 신념의 내용이나 특성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 비합리적 신념
엘리스의 공헌은 인간을 부적응으로 몰아가는 비합리적 신념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REBT에 따르면, 인간이 심리적 부적응과 장애를 나타내는 주요한 원인은 비합리적 신념입니다. 비합리적 신념은 자신,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와 요구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은 '반드시 ~해야 한다(musts, should).'라는 절대적이고 완벽주의적인 당위적 요구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비합리적 신념은 자신, 타인, 세상에 대한 당위적 사고의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한 당위적 요구로서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충족되기 어려운 과도한 기대와 요구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나는 반드시 탁월하게 일을 수행해 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능하고 무가치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와 같은 신념입니다.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자꾸 미루거나 불만족스러워하고 불안과 우울을 경험하게 되며 자기 비난과 자기혐오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신념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려운 비합리적 신념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부과한 당위적 요구에 의해서 부적응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러한 신념은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 패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념은 대부분 흑백논리와 과잉일반화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타인에 대한 당위적 요구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타인에게 지니는 과도한 기대와 요구로서 타인이 그러한 기대에 따르도록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신념을 의미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사람들은 항상 나에게 친절하고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 "진정한 친구라면 항상 내 편을 들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존중할 가치가 없는 나쁜 사람들이며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와 같은 신념입니다. 이런 과도한 기대와 신념은 필연적으로 실망, 좌절, 배신과 같은 마음의 상처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 분노, 적개심, 질주, 폭력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념은 개인의 특정한 행동보다 개인의 인격 전체를 싸잡아 부정적으로 매도하게 만듭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로 타인에게 부당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신념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은 분노, 증오, 불화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에는 전쟁이나 민족 말살과 같은 인류의 비극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세상에 대한 당위적 요구로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정치적 체제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에 대한 비현실적인 과도한 기대를 의미합니다. 예컨대, "우리 사회는 항상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안전하고 편안하며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세상은 항상 반드시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야 하며 나의 노력에 즉각적인 보상을 주어야 한다." "자연 세계는 결코 우리에게 부당한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참을 수 없는 곳이다."와 같은 신념을 뜻합니다. 이러한 신념은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공포,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행동, 우울과 자기연민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신념은 비현실적입니다. 이러한 신념은 좌절에 대한 인내력을 고갈시키고 우울과 무기력감을 느끼게 하며 일에 대한 의욕을 저하해 지연 행동을 유발합니다. 이러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의 당위적 요구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에 대해 분노를 느끼거나 원망과 저주를 할 수도 있습니다.
당위적 요구는 실현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좌절을 초래하여 건강하지 못한 부정적 감정과 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부적응적인 것으로 몰아가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비합리적 신념은 우리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비현실적인 것을 과도하게 요구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고 불행한 것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엘리스에 따르면, 이러한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신념이야말로 인간이 겪는 정서적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Karen Horney 역시 '당위적 요구의 폭정'을 신경증의 핵심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당위적 요구는 인간의 선천적 비합리성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주입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비합리적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신념의 현실성과 합리성을 재평가하지 않은 채 행동하거나 스스로에게 계속 주입함으로써 비합리적인 신념이 지속되거나 강화될 수 있습니다. 비합리적 신념의 변화는 가능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과 연습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엘리스는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당위적 요구를 지니고 태어나면 길러진다. 따라서 오직 고된 노력을 통해서만 이러한 당위적 요구를 건강한 소망으로 바꿀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2) 비합리적 사고
심리적 장애의 ABC 모델에 따르면, 역기능적인 부정적 감정이 일어날 때 다양한 비합리적 신념과 사고가 영향을 미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핵심 비합리적 신념입니다. 이러한 핵심 비합리적 신념은 다음과 같은 네 유형의 사고를 통해서 단계적으로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 첫째는 절대적인 강요와 당위로서 앞에서 설명한 당위적 요구를 의미합니다. 엘리스는 이러한 당위적 요구를 모든 정서적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비현실적인 과도한 기대를 만들어서 그것을 일방적으로 부과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지키도록 요구하고 강요합니다. 이것은 마치 스스로 다양한 계율을 만들어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폭군의 행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당위적 요구는 다양한 비합리적 사고 과정을 통해서 건강하지 못한 부정적 감정을 유발하게 됩니다.
두 번째의 비합리적 사고는 파국화 입니다. 이것은 당위적 요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그러한 현실의 결과를 과장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진정한 친구라면 항상 내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라는 당위적 요구를 부과했지만 친구가 자신의 편을 들지 않거나 상대방을 지지하는 경우에 "이것은 친구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심각한 일이다." "매우 중요한 끔찍한 일이다."라고 과장되게 해석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좌절에 대한 낮은 인내력으로서 당위적 요구가 좌절된 상황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비합리적 사고를 의미합니다. 흔히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형태의 사고로 나타납니다. 예컨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친구의 배신행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이런 일을 그냥 참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기대가 좌절된 상황은 너무 불쾌해서 도저히 참으며 살 수 없다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뜻합니다. 특히 이러한 비합리적 사고에 의한 다양한 심리적 문제는 '좌절 또는 불편감에 대한 인내력 장애'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 넷째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질책입니다. 당위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자신과 타인은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비난받거나 질책당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뜻합니다. 예컨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은 친구의 있을 수 없는 배신행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런 배신행위를 한 인간은 몹쓸 인간이다." "친구도 아니며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 사람을 친구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참 한심하다."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타인에 대한 분노, 비판, 경멸, 공격행위와 더불어 자기 비하와 자기 질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네 가지의 핵심 비합리적 사고는 비현실적인 당위적 요구가 과도한 부정적 감정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인지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ABC 모델에서 촉발 사건 A(자신의 편을 들지 않은 친구의 행동)가 결과적 감정 C(분노, 경멸, 자기 비하)를 유발하는 인지적 과정 B에 개입되는 비합리적 사고를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합리적 사고를 포착하여 변화시키는 것이 REBT 치료자의 주요한 과제입니다.
이 밖에도 내담자가 나타내는 정서적 문제에는 다양한 유형의 비합리적 사고가 개입합니다. REBT 치료자들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비합리적 사고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흑백논리로 사고하기, 둘째 잘못된 결론으로 비약하기, 셋째 미래를 함부로 예언하기, 넷째 부정적인 것에 초점 맞추기, 다섯째 긍정적인 것을 무시하기, 여섯째 전체로 싸잡아 평가하기, 일곱째 의미 축소하기, 여덟째 기분에 따라 함부로 추론하기, 아홉째 이름 붙이기와 과잉일반화, 열 번째 개인화, 열한 번째 잘못된 근거로 주장하기, 열두 번째 완벽주의.